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象村 신흠(1566~1628)은 한문사대가라 하여 月沙 이정구(1564~1635), 谿谷 장유(1587~1638), 澤堂 이식(1584~1647)과 함께 칭송 받는 문신이었다. 명성만큼이나 상촌의 문학적 업적을 보면 63권 20책을 한문으로 저술했다는 점과 순전 근엄한 고문의 적통을 이었다는 한문학사적인 평가가 그것을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광해군(1613) 5년 계축옥사로 유배기 당시에 창작한 작품은 한시가 아닌 우리말 노래인 시조였다.
시조는 李滉(1501~1572)이 「陶山十二曲」跋文에서 말했듯이 ‘한시는 읊을 수 있을 따름이고 노래할 수 없기에 우리말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시조는 조선시대 사대부라면 누구나 자신의 절실한 심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한시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고 본다. 신흠 또한, 자신의 심회를 표현하기 위해 시조를 하나의 심리적 표현의 수단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창작된 신흠 시조 30수를 통해 국문학사에서 시조가 지닌 의미의 중요성과 조선조 사대부의 사상을 알 수 있고, 사회적?문화적 가치도 확인할 수 있다. 문학사적으로 우리가 象村과 그의 문학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朝鮮 中期라고 일컬어지는 혼란한 시대적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폭 넓고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을 어느 누구보다 문학작품 속에 훌륭히 용해시켜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시조작품들은 그 자체의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대의 특수한 시대 현실 속에서 그가 가졌던 내면의식을 살필 수 있어 그의 문학 전반을 연구하는 데에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본고는 신흠 시조 30수를 대상으로 작품 속에 잠재해 있는 특징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또, 신흠 시조에 있는 다면적 특징을 통해 교육적 의의와 교육 방안까지 모색하고자 한다. 그럼, 학교 현장에서 시조 교육을 ‘신흠 시조’로 한다면 과연 어떻게 교수?학습할 수 있을까. 먼저 국문학사에서 신흠 시조가 갖는 시대 구분을 바탕으로 지도·학습하려고 한다. 즉, 신흠 시조에 대한 해석을 두고, 17세기 시가사에 대한 거시적 전망과 맞물려 있다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차에서 쟁점이 되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신흠 시조에는 강호가도의 면과 탈재도적인 면이 복합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어느 시기에 포괄해야 하는지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제공한다. 또한 시조 30수를 연작시로 보는 관점에서 지도한다면, 조선조 사대부들의 작시관행이라는 문학적 관습을 학습할 수 있고, 다른 관점으로는 여러 단형시조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주제와 정서를 신흠 시조 30수에서 지도할 수 있다. 이렇게 국문학사적 쟁점을 바탕으로 교육적 방안을 세운 후, 개정7차 교육과정의 기준에 따라 신흠 시조에 대한 자리 매김을 확고히 하는 것에 본고의 목적을 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