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서구 복지국가에서는 복지개혁 논쟁에 휩싸였다. 이 복지개혁의 논쟁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한 것이 연금개혁이다. 연금이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것은 연금개혁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금의 개혁은 기존의 분배구조에 변화를 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연금개혁은 어떤 식이든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급속한 노령화와 연금제도의 저부담-고급여 구조로 인해 연금재정의 안정성이 큰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또한 노인 사각지대의 비중이 커 기초연금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한국 연금개혁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연구는 연금개혁을 위한 정치적인 조건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정치적 무대에서 중요한 행위자들을 판별하기 위해 ‘거부자’(Veto Player)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거부자는 ‘정책의 변화를 위해서 동의를 얻어야 하는 모든 행위자’를 일컫는다. 이들 거부자는 헌법에 의해 권한이 부여된 제도적 거부자, 연립정부의 구성으로 권한을 얻는 정당거부자, 그리고 사회적 협의 체제를 통해 권한을 얻는 비공식적 거부자로 구분된다. 또한 거부자 내부의 행위자 수와 그 구성에 따라 집단거부자와 개인거부자로 나뉠 수 있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의 거부자는 개인거부자인 대통령과 집단거부자인 국회와 노사정위원회가 된다. 개인거부자인 대통령은 국회에서 다수당을 형성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존재로 인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상당히 적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한국 연금개혁에 있어서는 거부자에서 제외된다.
집단거부자인 노사정위원회는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익집단들로 구성된다. 현재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익집단은 한국노총, 경총, 그리고 전경련이다. 노사정위원회의 권한과 지위는 법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정책과 관련 정책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는 그 역할에 관한 내부자들의 갈등과 대외적인 대표성과 정당성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정부로부터도 정책과정에서 소외받고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산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기 전에는 노사정위원회의 제 기능을 발휘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사정위원회도 거부자에서 제외된다.
마지막 집단거부자인 국회는 다수의 정당거부자들로 구성된다. 한국에서 국회에 진출한 정당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그리고 국민중심당이다. 그 중에서 거부자의 지위에 있는 정당은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이다. 이들은 한국 연금정책에 있어 유일한 거부자들이다. 각 정당들은 연금개혁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도 단결력을 보여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합의를 이끌어 내는가이다. 이 연구는 실질적 거부자들이 정당이라는 점에 근거해, 연금개혁을 정당정치의 논리로 풀어내고자 했다. 연금개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여러 정당들의 합의이다. 이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비난회피’의 정치를 통해 가능하다. 연금개혁은 그 특징상 연금 수급자들을 현재보다 불리하게 만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연금 수급자, 즉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요인이다. 정당들, 특히 집권당은 이 비난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집권당은 연금개혁의 합의과정에 최대한 많은 정당을 끌어들여 비난을 분산시켜야 한다.
한국에서 연금개혁과 관련된 중요 행위자, 즉 거부자는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이다. 이들 삼자 간의 합의가 연금의 개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연금개혁 과정에서 이들 정당들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바로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정부에 대한 원망이다. 국민들은 현행 연금제도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개혁안에도 회의적이다. 이들 정당들이 국민들의 불신을 없애고 인식의 개선을 이루어낼 수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 연구는 연금개혁과 관련된 정치·사회적 행위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들인 정당들을 찾아내고, 연금개혁의 문제를 정당정치, 즉 정당 간의 합의를 통한 ‘비난회피’의 정치로 귀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