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支刀와 4세기 百濟의 對倭關係 硏究

Author(s)
최찬묵
Alternative Author(s)
Chol, chan-muk
Advisor
박옥걸
Department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Publisher
The Graduate School, Ajou University
Publication Year
2005
Language
kor
Abstract
菅政友에 의해서 七支刀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이를 둘러싸고, 百濟下賜說·百濟獻上說·東晋下賜說·僞作說 등 많은 학설들이 제기되었다. 七支刀가 하행문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倭王을 侯王이라 칭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은 百濟下賜說이다. 칠지도를 둘러싸고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제작시기이다. 이에 필자는 백제 금석문의 서체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칠지도의 제작시기를 한성시대로 보았다. 이어서 ‘奉□’가 백제의 연호인 점에 유의하여 백제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국력이 강했던 시기를 近肖古王 때로 보았다. 近肖古王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야와 마한을 정벌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데 이어서 황해도 진출에 성공한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동진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왜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당히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近肖古王 때 칭제건원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369년 11월에는 한수 남쪽에 대열병을 하면서 황제가 사용하는 황색깃발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연호를 ‘奉□’로 제정하면서 칭제건원 했을 것이다. 이 해를 기념해서 4년 후(372년, 近肖古王 27년)에 七支刀를 만들어 倭에 하사했으며, 七支刀의 제작일이 11월 16일인 것도, 바로 연호를 제정한 달이 대열병식을 한, 11월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倭에 하사된 칠지도를, 일부에서는 남방정벌에 왜군이 참여한 댓가로 보고 있다. 이에 필자는『日本書紀』에 대한 철저한 사료비판을 통해서 왜의 군사적 도움은 전혀 없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백제의 사신이 탁순에 간 것은 364년이고, 사마숙례가 탁순인을 따라 백제에 온 해가 366년(近肖古王 21년)이다. 백제와 왜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관계 성립은 366년에 이루어진다. 그로부터 4년 후인 369년(近肖古王 24년), 백제는 남방정벌을 단행한다. 외교관계 성립이 이루어진 지 4년 만에 왜가 군사를 바다 건너 한반도 남쪽에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가지 않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 기마전술이 일반화되지 않은 왜가 한반도 전쟁에 참여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백제가 왜국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은 시기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의해서 백제의 힘이 약화되는 시기에 한정된다. 한편, 일부에서는 칠지도 명문에 倭王을 侯王으로 칭한 것을 근거로 해서, 백제가 왜를 정치적으로 종속시켰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 각종 신화들을 살펴보면, 초기 한일관계의 전개는 백제를 중심으로 전개 되었다기 보다는 가야와 신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 성립은 366년이고, 이러한 관계가 보다 공고히 된 것은 백제가 칠지도를 왜에게 하사한 372년(近肖古王 27년)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제는 왜에 철을 비롯한 선진문물을 전해주면서 왜국을 확실하게 자국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중국이 주변의 나라에게 선진문물을 전해주면서 조공무역을 했듯이, 백제 또한 왜에게 선진문물을 전해주면서 의례적인 상하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때 왜국이 가장 의미있게 받아 들였을 물품은 바로 칠지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칠지도를 제작한 목적은 무엇일까? 칠지도는 기존의 수목신앙을 토대로 전제왕권을 불완전하게나마 뒷받침 하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이는 칠지도의 제작시기가 남방정벌이 완결된 시점이란 점, 모양이 신단수와 같은 신성한 나무들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 그리고 칠지도를 보관했던 石上神宮이 古代神社史上에 특필할 만한 다마후리(招魂)의 神宮이었으며, 삼한의 소도에서 보이는 어사일럼(Asylum)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당시 전제왕권을 확립하는데 필수적인 고등신앙이 백제에는 없었다. 근초고왕은 가야와 마한을 정벌한 상황 속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는 고등신앙을 불완전하게나마 기존 소도의 수목신앙으로 대신하려한 것이다. 近肖古王은 마한과 가야만을 묶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칠지도를 왜국에 하사함으로써, 백제를 중심으로 한 가야, 마한의 소국, 왜국을 하나로 묶는 범백제 세력권을 형성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제와 왜의 관계가 성립된 이유는, 백제 쪽에서는 잠재적인 적대국인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왜국의 입장에서는 철을 비롯한 우수한 백제문화의 안정적인 수입을 하기 위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近肖古王은 탁월한 식견을 갖춘 명군주였다. 왜국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재빠르게 파악해서 왜와의 국교를 성립시켰다. 즉, 왜국이 고대국가 발전에 없어서는 안될 철에 대한 안정적 수입을 열망함을 간파하고는 백제의 뛰어난 제철기술을 과시하기 위해서 금으로 상감한 기이한 모양의 칠지도를 하사했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어,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는 백제부흥운동을 왜국이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했다.
URI
https://dspace.ajou.ac.kr/handle/2018.oak/16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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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Graduate Schools >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 History Education > 3. Theses(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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