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서사적 자아의 자기동일적 정체성 탐구 과정을 융의 분석심리학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김동리의 ‘구경적 삶’의 의의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서사적 자아가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구경적 삶’을 구현하고 실현하는 삶이다. 그들은 일상적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혹은 자기 안에 있는 신을 찾고 있다. 연구대상으로 한 9편의 소설은 서사적 자아가 원형을 매개로 하여 자기동일적 정체성 탐구를 지향하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인다.
김동리 소설에서 서사적 자아의 정체성 탐구의 과정은 그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첫째 원형의 추동력으로 인해 정체성을 인식하고 이를 발현하고자 하지만 아직은 과정에 놓여있는 모습과, 원형을 억압당하여 고통받지만 이를 계기로 더욱 정체성을 인식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둘째 원형적 공간이나 인물들을 매개로 정체성을 탐색하는 모습이 나타나며, 셋째 통과제의 과정을 통해 원형을 대면하고 정체성 정립의 단계로 나아가지만 그 한계에 처하기도 한다.
Ⅱ장에서는 서사적 자아의 정체성 인식이 나타나는 <황토기>, <역마>, <당고개 무당> 등을 살펴보았다. 서사적 자아는 고유한 개성을 외부세력에 의해 억압당하거나 박탈당하고 고통받는데 이를 계기로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탐구해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때 억압이나 박탈에 의한 고통은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자기원형의 추동력에 기인한다.
<황토기>에서는 주인공 ‘억쇠’를 통해 한 인간이 개성의 억압으로 고통받고 그 고통을 계기로 정체성을 인식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자기원형은 페르조나에 편향된 억쇠에게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억쇠가 힘을 억압할수록 힘의 발산을 열망하는 것은 자기원형의 추동에 의한 것으로 정체성 인식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고유한 개성을 억압당하고 박탈당했을 때에 정체성을 더욱 새롭게 인식하고 이를 회복하고자 열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역마>에서는 주인공 ‘성기’가 역마살의 억압으로 인해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때 역마살은 정체성 인식을 촉구하는 성기의 개성이다. 성기의 자기동일적 정체성 인식은 자기원형의 추동에 의해 역마살을 의식하고 탐색의 길로 나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성기의 모습은 김동리의 ‘구경적 삶’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당고개 무당>의 주인공 당고개 무당은 두 딸들에게 무업을 박탈당하자 자기동일적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고 회복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고개 무당의 고통과 갈망은 정체성 인식을 촉구하는 자기원형의 추동력 때문이다. 결국 당고개 무당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고유한 개성을 억압하는 강압적 상황은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Ⅲ장에서는 <무녀도>, <용>, <만자동경> 등을 중심으로 서사적 자아가 침잠을 통해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탐색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침잠은 성찰이나 사색을 통해 자신의 세계에 깊이 몰입하거나, 물속에 깊이 가라앉아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 등 중의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무녀도>에서는 주인공 ‘모화’가 오구굿을 통해 자신의 한과 죽은 김씨 부인의 한을 승화시키는 과정이 나타난다. 이는 자기원형의 추동에 의한 것이다. 이 추동력으로 인해 모화는 무녀로서의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하게 된 것이다.
<용>에서는 주인공 ‘자아’가 은둔하여 하늘의 때를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자기동일적 정체성 탐색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자아의 정체성 탐색의 과정은 자기원형의 추동에 의한 은둔과 때의 기다림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정체성 탐색의 매개이자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만자동경>에서는 고향과 고향의 원형을 상징하는 연달래와 석노인을 통해 화자인 ‘나’의 자기동일적 정체성 탐색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고향의 흔적은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나’의 존재와 삶을 있게 한 근원으로써 현실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Ⅳ장에서는 서사적 자아의 정체성 정립과 그 한계가 나타나는 <등신불>, <을화>, <사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자기동일적 정체성 정립의 양상과 그 한계를 살펴보았다. 정체성을 정립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과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부단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따라서 정체성을 정립하기까지의 과정은 실패와 좌절, 절망과 고통이 따르는데 이를 극복하고 정체성을 정립하기도 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등신불>에서는 등신불이 된 ‘만적’의 이야기를 통해 화자인 ‘나’의 자기동일적 정체성 정립의 과정이 그려진다. ‘나’는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과하면서 차차로 내면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 여정은 자기원형의 추동에 의한 자기동일적 정체성 정립의 과정이다. 타인의 삶을 통한 간접적 경험은 자신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정체성을 정립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을화>에서는 주인공 ‘을화’가 입무과정을 통해 정신적이고 심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을 정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을화는 입무과정을 거쳐 새롭게 정체성을 정립하고 살아가던 중, 아들과 대립하다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체성 정립은 어느 한 지점에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 의해 좌절될 수도 있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반의 십자가>에 나타난 기독교적 요소는 종교적 색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전 인류에 공통적인 인자인 원형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원형은 정체성 정립을 촉구하는 기제이자 추동력으로 기능한다. 이 소설에서는 ‘사반’과 ‘예수’의 생애가 병치적으로 나타난다. 사반은 예수의 권능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들이 근원적 문제를 자각하고 믿음의 회복이 선행되어야 함을 설파한다. 예수는 사반의 원형상으로서 유대인들이 믿음을 회복하여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기를 촉구하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즉 예수는 사반의 의식을 초월하는 선험적인 존재로서 사반의 내면의 변화를 촉구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진정한 정체성 정립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서사적 자아의 자기동일적 정체성을 살펴보고, 김동리의 작가의식을 심층적 관점으로 이해하고 그 세계관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 상실로 인한 문제제기와 이의 회복을 기대하는 통찰적 사고의 계기가 된다. 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원형성은 그 원형을 통해 본질적 모습의 탐구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과거지향적이거나 낡은 것이 아니라 현대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원형성은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이끌어내고 미래로 나아가도록 촉구하는 매개로써 현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전통적인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더 나아가 개인의 정체성 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세계를 복합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의 원형적 세계는 외부세계에만 집중되어 있는 우리의 삶을 진단하고 이러한 삶에서 방향을 돌이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데 그 근거가 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는 오늘날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시사점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동리의 ‘구경적 삶’은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원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는 오늘날에도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유효하게 통용되는 영원한 문학적 명제이다. 그의 소설이 집중하는 문제의식은 인간의 존재 목적에 대한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자기와 원형을 되찾고 새롭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