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용의 「구곡(九曲)」은 불교적 사유와 언어관에서 비롯된 난해성과 실험 정신으로 시의 사상과 언어적 형상화의 깊이를 보여준다. 가상과 본질을 통합하고자 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의 태도는 현세적 평등의 각성으로 드러나며,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은 전 인류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선불교의 언어관에 따른 언어의 한계에 대한 각성으로 다양한 시적 형상화의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자유로운 사유의 방향을 제시한다.
「구곡」은 ‘진아(眞我)’에 대한 회의와 사색의 과정을 통해 존재가 지향하는 궁극의 가치를 정립해 나간다. 다양한 상징의 변용을 통해 최고의 가치 구현과 현실적 실천의 문제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다. 또한 시간과 무시간(無時間)의 대립과 화해, 삶과 죽음의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대한 탐구,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지 않음에 대한 성찰의 과정을 통해 대립적인 양 극단의 세계를 하나로 통합한다. 이는 ‘연기설(緣起說)’을 기반으로 한 ‘불이(不二)’의 세계를 ‘중도(中道)’적 방법으로 실현하는 불교적 사유의 결과이다.
가상으로서의 언어를 부정하는 태도는 언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시 전반의 실험적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다양한 장르적 특성들을 시에 적용함으로써 전통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또 주어나 실체의 생략, 문법질서의 파괴, 추상명사의 다양한 활용을 통해 사유와 인식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이는 묵계와 직관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선불교의 언어 부정의 태도를 「구곡」의 시적 형상화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임시적 존재에 불과한 자아의 실체 없음에 대한 인식은 ‘불성(佛性)’ 평등의 사상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불성’의 평등은 「구곡」에서 현세적 평등으로 치환된다. 이는 자아가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가치가 형이상학적 이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한 시인의 현실 극복의 방법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 평등이 구현된 본질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김구용은 「구곡」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가상의 세계와 본질의 세계를 통합하는 ‘진아’에 도달하고자 하며, 사회적으로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정신으로 ‘현세적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다. 또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실험적 시 쓰기를 통해 끊임없는 회의와 실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유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시인의 선구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