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仁祖代의 經世論과 主和論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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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ontributor.advisor조성을-
dc.contributor.author김병규-
dc.date.accessioned2018-11-08T06:09:54Z-
dc.date.available2018-11-08T06:09:54Z-
dc.date.issued2008-08-
dc.identifier.other9166-
dc.identifier.urihttps://dspace.ajou.ac.kr/handle/2018.oak/2738-
dc.description학위논문(석사)--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2008. 8-
dc.description.abstract본연구는 丁卯胡亂과 丙子胡亂을 전후한 시기의 대표적인 主和論자였던 李 貴와 崔鳴吉의 經世觀을 정치활동과 학문관을 통해서 究明해보고,이들 主和論 의 論理構造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귀는 兩亂의 격동기를 살면서 일관된 정치론으로 소신껏 정치활동을 전개 한 實踐的正論家였다.그는 당대의 주류 관인들과는 다른 파격적인 처신을 보 였는데 이는 냉철한 현실인식과 새로운 학문관,그의 국가에 대한 治者로서의 責務意識에서 나온 것이다.인조대 전반 이귀는 스승인 이이와 성혼의 變通論 과 破朋黨論을 계승하여 變法的經世論을 적극 펼쳐 나갔다.이로 인해 朱子學 정치사상에만 집착하는 주류 官人ㆍ孺者들과는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여기에 는 주자학 가운데 義理와 德業만을 내세우는 주자학 名分論者들에 대해서 識見 과 事功을 강조하는 이귀의 새로운 학문관이 그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론과 학문관 등의 經世觀은 후대 탕평론의 기초를 마련하였 고,실학사상으로 계승.발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丁卯胡亂期에 主和論을 대표하였던 이귀는 對明義理論을 고수하면서도 後金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經權論ㆍ事勢論ㆍ保民論으로 합리화 하 였다.따라서 斥和論이 명의 ‘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주자학 名分論과 義理論 을 국가의 존립 그 자체보다 중시하는 입장이었다면 主和論은 保民을 위한 국 가의 존립을 우선하는 사고였다.主和論은 후금의 침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국가를 維持.保存하기 위해서는 인조 정권의 집권 명분이었던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 조차도 굽힐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었다.이와 함께 이들에게서는 華夷論에 종속된 ‘藩邦’관념에서 이것과 분리된 독자적인 ‘國家’관념을 엿볼 수 있다.이후에 등장한 실학과 탕평론은 이러한 主和論的경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조대 정국을 이끌어 간 최명길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공신이면서도 陽明 學的인 현실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경세관에서 時勢에 따른 變通論과 민생의 안정을 위한 均賦를 주 장하였다.변통론은 현실상황에 대응하여 權道論으로 나타났고,현실의 정치문 제에 대해서는 變法論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실인식에 따라 인조대 가장 큰 懸案이었던 元宗追崇과 청과의 관 계에 대하여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견대로 추진 완성하였다.이것 은 또한 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갔다가 贖還되어 온 士族女의 이혼을 반대하는 데도 적용되었다.이러한 현실인식과 함께 최명길의 정치적 위치는 官制變通 에도 관심을 보여 署事制복구를 통한 대신권의 강화와 언론활동의 效率性提 高,蔭官의 初入仕職제한을 추진하게 하였다. 또 최명길은 외교에 있어서도 자신의 主和입장을 명백히 하고 이것을 일관 되게 밀고 나갔다.최명길이 主和를 주장한 이유는 우선 민생을 안정시키자는 것이었으며,국방력을 강화하여 다음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은 아니었다.조선 의 신속하고 강경한 斥和論에 맞서 최명길은 보국안민을 위해 시세에 따른 변 통을 주장하였다.최명길은 權道論에 입각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냉 철한 대처로 주화를 주장하여 백성과 宗廟社稷을 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귀와 최명길의 經世論은 變通論에 근거하여 항상 변화하 는 현실에 대하여 상황변화에 맞추려고 노력하였고,당시의 정치,경제,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점에서 공통된 면이 있다. 다음으로 이들의 주화론을 정리해보면 이귀의 정묘년의 강화는 단순히 종사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保生民’을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保生民’ 이야말로 ‘安宗社’의 관건이라고 하여 자신의 主和論이 ‘國事와 民事의 일치를 추구하는 保民論’의 발현이었음을 강조하였다.또 이귀는 보민론을 내세우면서 국방 강화에도 관심을 보였다.경오년에 主戰論을 주장하면서 군사적 대안까지 제시하여 그의 군사 기반을 다지려 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최명길은 主和를 일관되게 주장하였다.그 이유는 우선 민생을 안 정시키자는 것이었으며,국방력을 강화하여 다음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은 아 니었다.오로지 백성과 宗廟社稷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다. 이귀,최명길의 主和論은 국제관계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냉정하게 대처하려 한 것이었으며,權道論에 입각하여 이념보다는 국가를 중시하여 백성 과 종묘사직을 구할 수 있었다.이것은 당시 명분론적 입장에서 斥和를 주장하 던 西人士類일반이나 여론의 눈치를 보던 김류 등 대신 일반과는 다른 것이 었다. 이상의 연구에서 李珥의 變通論과 破朋黨論은 인조대 이귀,최명길의 經世論 과 主和論으로 이어져 후대 蕩平論과 이익 등 실학자들의 사상과 주장에 영향 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dc.description.tableofcontentsⅠ. 서론 = 1 Ⅱ. 李貴의 經世論과 主和論 = 5 1. 李貴의 經世論 = 5 1) 실천적 政治活動과 責務意識 = 5 2) 政治論과 學問觀 = 9 2. 丁卯胡亂 이전의 主和論 = 17 1) 丁卯胡亂 이전의 對 後金策 = 17 2) 江都 保障論 對 臨津江 把守論 = 25 3. 丁卯胡亂 직후의 主和論 = 30 1) 權道論과 正論의 대립 = 30 2) 抄兵待命論 對 劉興治 討伐論 = 38 Ⅲ. 崔鳴吉의 經世觀과 主和論 = 47 1. 崔鳴吉의 經世論 = 47 1) 時勢의 변화에 따른 變通論 = 47 ① 元宗追崇 문제 = 50 ② 贖還女의 離婚 문제 = 57 2) 社會 經濟策 均賦 = 58 3) 官制 變通論 = 62 ① 大臣權의 강화 = 64 ② 言論活動의 效率性 提高 = 68 ③ 蔭官 初入仕職의 제한 = 75 2. 崔鳴吉의 主和論 = 78 1) 丙子胡亂 이전의 主和論 = 78 2) 丙子胡亂 이후의 主和論 = 81 Ⅳ. 結論 = 87 참고문헌 = 94-
dc.language.isokor-
dc.publisherThe Graduate School, Ajou University-
dc.rights아주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dc.title朝鮮 仁祖代의 經世論과 主和論 硏究-
dc.typeThesis-
dc.contributor.affiliation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dc.contributor.department교육대학원 역사교육-
dc.date.awarded2008. 8-
dc.description.degreeMaster-
dc.identifier.localId567083-
dc.identifier.urlhttp://dcoll.ajou.ac.kr:9080/dcollection/jsp/common/DcLoOrgPer.jsp?sItemId=000000009166-
dc.subject.keyword인조-
dc.subject.keyword경세론-
dc.subject.keyword주화론-
dc.title.subtitle李貴와 崔鳴吉을 중심으로-
Appears in Collections:
Special Graduate Schools >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 History Education > 3. Theses(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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