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9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하나인 유하의 시적 변모 과정을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진정성’ 개념을 참고한다. 진정성은 참된 자아의 실현과 공적인 참여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유하 시의 현실 비판적 면모와 내면적 면모를 모두 수용할 수 있다.
당대 한국 사회는 민주화, 사회주의 붕괴, 경제성장 등을 통해 자본주의가 점차 확산되는 변화를 맞이한다. 이에 따라 현대의 문명 도시는 더 화려하고 풍요롭게 거듭나지만, 급격한 도시화와 물신화는 여러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 유하는 자신의 시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유하의 첫 시집인 『무림일기』는 독창적인 창작 기법이 돋보인다. 그는 싸구려 무협지의 형식을 그대로 시에 반영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한 곳인지 비판하는 한편, 영화를 통해 도시 공간에서의 삶을 관찰한다. 정치적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정치에 대한 당대 사회의 관심과 호응하며 가장 주목받는다.
두 번째 시집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유하는 창작 기법을 유지하는 한편, 비판의 대상을 자본주의의 상징인 현대 도시로 좁혀나간다. 그는 ‘압구정동’이라는 시적 공간을 내세워 화려한 도시적 공간의 이면을 폭로하면서 ‘하나대’라는 자연 상징의 공간을 대비시킨다.
세 번째 시집인 『세상의 모든 저녁』에서는 이전까지의 서정성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시는 점점 비대해지며 물신의 가치관이 확산되는 반면, 자연은 쇠락하여 안식처가 될 수 없다. 유하는 자연에서 느꼈던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내면과의 접촉을 통해 고뇌하고 자기반성에 도달한다.
네 번째 시집인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는 유하 자신의 청소년기를 시에 투영한다. 그는 ‘세운상가’라는 시적 공간을 통해 70년대의 청춘들에게 대중문화의 통속적 산물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한편, 욕망으로 들끓던 사춘기를 추억한다. 또한 과거의 도시 공간인 ‘세운상가’를 추억하며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비애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유하는 현재의 도시 공간 속에서 서정시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된다.
이처럼 유하의 시 의식은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도시 비판과 자연 지향, 내면적 고뇌와 성찰, 과거에 대한 추억과 도시적 서정으로 이어져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따라 유하의 시 세계 전반에 접근하는 것은 지금까지 쉽게 합쳐지지 않았던 압구정동과 하나대, 풍자와 서정, 도시와 자연 등 유하 시의 중요한 개념을 총체적으로 접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