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은 축성 이후 수차례의 자연재해와 풍화, 인위적인 파괴로 인하여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 19세기에 화성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1846년(헌종 12) 6월 9일의 폭우 때문이었다. 이날의 폭우로 인해 화성의 부속시설물이 훼손이 되었고 2년 후인 1848년(헌종 14)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행되었다. 화성은 일제강점기에도 몇 차례 폭우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수원천이 흐르는 북수문과 남수문의 피해가 가장 컸다.
수원 화성은 수해 등의 자연재해 외에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방치와 의도적인 훼손, 6․25 전쟁으로 인한 파괴, 그리고 축성 이후 200여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등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이에 수원 화성의 시설물에 대한 수리와 복원이 시행되었는데 그 주체는 시대마다 달랐지만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공통된 사항이었다. 19세기는 조선의 조정(朝廷)에 의해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서 수리 ․ 복원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화성의 훼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미온한 대처 때문에 수원보승회(水原保勝會), 지역유지와 수원면민(水原面民)들의 노력으로 복원이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았다.
6․25 전쟁은 수원 화성이 축성된 이후 가장 큰 수난을 겪게 된 사건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문루(門樓)가 크게 파손된 장안문을 비롯하여 창룡문의 문루와 성곽이 크게 파괴되었다. 1960년대 까지는 전쟁에 대한 여파로 인해 문화유적에 대한 복원을 할 여력과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파괴된 화성의 시설물에 대한 대규모 보수 ․ 복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민족주의에 눈을 돌렸다. 박정희는 민족 역사와 영웅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문화유적 복원에 대한 정책을 만들었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여론을 억누르는 한편 친일정부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이순신을 활용하였다. 이순신 성웅화를 위한 현충사 성역화 사업은 문화유적 복원사업의 효시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들어서 국민들의 독재정권에 대한 반발, 북한과의 체제경쟁, 미국과의 갈등 등의 문제에 직면했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자주국방을 강조하게 되었고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문화재 복원 사업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였기 때문에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정부의 의도에 맞춘 선별, 국수주의적인 시각, 국가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국민들에게 인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수원 화성의 보수 ․ 복원사업은 이러한 ‘호국문화유적(護國文化遺蹟)’ 복원사업의 일환이었다. 화성은 구한말 이후 70년 넘도록 대규모 수리를 하지 못했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전체적인 수리 ․ 복원을 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만 복원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다르게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진 복원이었다.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은 당시의 호국문화유적 복원사업 중 서울성곽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예산이 소요되었다. 정조 사후 진행되었던 화성의 보수 ․ 복원 사업 중에서도 이 당시의 복원이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었다.
‘수원성곽복원정화사업’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 동안 실시되었고 동시대에 이루어진 다른 민족문화유적 복원사업보다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수원 화성은 박정희 정권 때 실시한 복원사업으로 인하여 20여년 후인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화성의 복원은『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완벽한 복원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어느 정도는 성공적인 복원이었다.
주제어 : 수원 화성, 문화재 복원사업, 박정희, 화성 복원